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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무적조선수군
2009/11/11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3/3] [11]
2009/11/09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2/3] [25]
2009/11/07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1/3] [38]
2009/11/02   [명량대첩] 명량대첩의 전개와 의의 [180]
2009/10/29   [직산대첩 연재] 본론 : 직산대첩? 직산전투! [16]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3/3]


※ 일러두기
사적이나 기타 유물, 유적 지정은 제외했습니다.
충무공 사후부터 시작된 증직, 추증, 사당, 동상, 비 에 대해 주로 적었습니다.
비어 있는 공란은 제 능력이 모자라서 미처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기와 왕들의 연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낚이면 지는 부제 : 군부 독재를 정당화하고 민주화를 가로막은 충무공 이순신ㅡ.ㅡ

제목 :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3/3)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 열풍(3/3)
3회차 :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 ~ 현재까지


 

박정희 대통령 집권 ~ 현재까지

 

박정희 대통령 집권(1967~)

일시

행한 일

주관

비고

1967

이순신 동상 세움

 

여수시 자산공원

1968. 4. 27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동상 설립

정부산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서울신문사의 공동주관

박정희 대통령 지시

1969

충무사 중건

 

전남 해남

1973

충무공 이순신 석상 세움

충무공 이순신 석상 세움

 

3월 삼천포시 노산공원

4월 중앙청

1974

충무공 이순신상 세움

 

8월 목포시

1975

한산도 제승당 성역화 사업 착수

이충무공 군사훈련 유적비 세움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비 세움

 

4월 한산도(1966~1974)

7월 진양군 수곡면 원계리

12월 사천군 선진리

1979. 10

한산대첩 기념비

 

한산도

박정희 대통령 집권 종료 후(1979~)

1979. 12

거북선 복원하여 진수

해군

 

1980. 4

충무사 세움

 

고흥군 내발리

1982

이충무공 모부인 유적비

당항포대첩 기념탑 세움

 

4월 여천시 웅천동

8월 고성군 당항리

1987

송충당, 충무공 기념관 세움

 

11월 고성군 당항리

1988

오충사 사적비 세움

신성포 전적비 세움

 

4월 해남 오충사

순천시 신성리

1989

충무공 해전 유물 발굴 추진 지시

충무공 해전 유물 발굴단 창설

노태우 대통령

4월 7일

8월 7일

1990. 4

이충무공 유적 기념비 세움

 

4월 고금도

1990

우수영국민관광단지

 

명량대첩 기념 공원

1991.

이충무공 사모비 세움

명량대첩 기념비 세움

 

2월 여천시 웅천동

해남

1994. 8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대형 총통을 복원하여 발사시험

해군사관학교

 

1996. 6

옥포대첩기념공원

거제시?

거제시 아주동

1996

충무공 해전 유물발굴단 해체

해군 충무공 수련원 창설

 

7월 31일

12월 1일 진해

1997. 5

사천해전 상황도 설치

 

5월 사천 선진리

1998. 12

순국 400주년 계기 ‘충무공 유언비’를 세움

 

남해 관음포 전몰 유허지

1999. 9

노량해전 상황도 설치

 

남해 관음포 전몰 유허지

2005

통영 충무공 이순신 동상

충무공 이순신 동상 건립위

 

2006. 1

충무공 리더십 센터 창설

 

충무공 수련원을 모체로 함

2008. 10. 11

진도 명량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

 

05년부터 사업 실시.

30미터, 국내 최대

사천 용해면 선진리에도 충무공 동상이 있습니다(건립 년도 미상)

박정희 대통령의 시기를 1967년에서 1979년까지 12년간으로 보았을 때 10건에 해당합니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꼴이죠.
다른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단순 무식하게 주먹구구식으로 추산하면,

조선왕조시기 : 35건 (300여년간)                    -> 1년당 0.1건
일제강점기~박정희 집권 전 : 34건(50여년간)   -> 1년당 0.6건
박정희 집권 간 : 10건(12년간)                        -> 1년당 0.8건
현재까지 :  22건(발굴단 해체는 제외) (30여년간) -> 1년당 0.7건

조선왕조시대의 경우는 제쳐두고서라도, 일제강점기나 박정희 시기, 그리고 그 이후의 빈도수는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디까지 저 '추산'의 결과가 빈약한 저의 조사로 이뤄진 것이니만큼 정확하지 않은 데이터이고, 정확하지 않은 데이터를 통해 나온 정확하지 않은 평균입니다. 저야말로 "이겄시 진실입니톼!"라고 강변할 생각은 없습니다-_-

그러나 따로 정리된 자료를 구하지 못한 이상, 이러한 부실한 데이터를 토대로 결론을 내려보겠습니다(어쩔 수 없)


분명히 박정희 대통령 집권간에는 타 시대보다 약간 높은 비율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해하고 계신 분들의 말처럼 유별나게 높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기가 대한민국이 한창 이런저런 이유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시기인 것을 상기해 보세요.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 전세계 최빈국을 랭킹한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충무공에 대한 추모 사업은 계속 되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 한민족이 단체로 미쳐서 충무공을 잊거나 멸망하지 않는 이상 계속 될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나 외국인들이 제가 지금까지 정리한 도표를 보면서 마치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충무공 기념 사업을 주기적으로 하라고 따로 지시나 지침을 주지 않았는가 의심할까봐 오히려 걱정입니다(........)


- 진단학회가 설마 반공 이데올로기, 더 나아가서 이어질 독재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기념 논문집을 냈을까요?
- 김구 선생이 할 일이 없어 친필로 시비를 세웠을까요?
- 역대 임금이 심심해서 충무공을 찬양하고 모든 군사-행정 정책의 비교 대상으로 삼아 신하들을 갈궜을까요?-_-
- 이순신을 찬양한 선비들이 쓴 시는 이충무공전서에 잔뜩 실려 있음...이거 또 왕이 시켜서 썼다고 주장 할 사람들 있겠지
- 사포 김만중, 우암 송시열...이 선생들 당파가 어디인지 아시죠?
원균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본의 아니게 욕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이덕형의 당파는?(실록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음)
- 선조 사후 선조실록 작성의 주관자인 농담정승 이항복 대감의 당파는?
- 평소에 흰옷을 입고, 알아서 제사를 모신 남해안 백성들은 근대 민족주의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을 존경해서 입었을까요?
- 심지어 북한에도 충무공 훈장이 있습니다(............)


결론 : 충무공은 이미 한민족 내부에 자리잡은 영웅이었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과소평가 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태여 영웅화, 성웅화를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본좌다-_-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1/3]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2/3]


[참고자료]
<<이순신 파워인맥>> : 도표의 상당부분은 <<이순신 파워인맥>>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현충사 사이트
충무공 이순신 사이트
덕수 이씨 종친회
네이버 백과사전


PS : 이런 글을 한 포스팅에 몰으려고 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니 미친짓(...........)

PS 1 : 예전부터 정리해 보고 싶었는데 <<이순신 파워인맥>>에 도표가 잘 정리되어 있어 베이스는 그것으로 해서 이곳저곳에서 참조해 증강시켰습니다^^

PS 2 : 이제 기다리시는 분은 많지 않겠지만 직산대첩 GoGo

PS 3 : 오늘은 빼빼로데이가 아니라 농업인의 날 곧 노량해전이 얼마 안남았군요.

by zert | 2009/11/11 10:08 | 무적조선수군 | 트랙백 | 덧글(11)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2/3]

※ 일러두기
사적이나 기타 유물, 유적 지정은 제외했습니다.
충무공 사후부터 시작된 증직, 추증, 사당, 동상, 비 에 대해 주로 적었습니다.
비어 있는 공란은 제 능력이 모자라서 미처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기와 왕들의 연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제 :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앞장선 충무공 이순신 ㅡ.ㅡ

제목 :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2/3)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 열풍(2/3)
2회차 : 1900년 ~ 박정희 대통령 집권 직전

1900년 ~ 박정희 대통령 집권 직전

일시

행한 일

주관

비고

20세기(1900년 이후)

1906 (순종1)

현충사유허비 건립

아산지방유림

을사보호조약에 항거

1911

월산사 유허비

 

함평군 향교리

1921

오충사 세움

 

여천시 웅천동

1932. 6. 5.

현충사 중건, 영정봉안

이충무공 유적보존회,

동아일보사가 성금 모금

 

1934

<<이충무공전서>> 속간(권15, 16)

 

청주

해방 이후(1945. 8. 15일 이후)

1946. 5월

진해시에 이충무공 시비 세움

강진에 금강사 재건립

 

김구 선생 자필 씀

 

1947

여수 충민사

지방 유림

일제 때 철폐된 사당을 원위치에 재건

1948

남해 충렬사비 세움

한글 유허비 세움

 

11월 남해 노량

12월 한산도 제승당

1949

순천 충무사 세움

 

순천 해룡면

1950

남해 관음포 : 이충무공 전적비 세움

진단학회 : 이충무공 기념 논문집 발간

 

남해

 

1951

이충무공 비각 세움

국민의 성금

8월 아산 온양역

1952. 4. 13

진해에 충무공 이순신 동상 세움(국내 최초)

 

국내 최초 충무공 동상

1952

성웅 이순신 공덕 기념비

순천 충무사 사적비

 

경남 사천시

순천

1953

이순신 공덕 기념비

고금도 충무사 세움

통제사 충무이공 기념비

 

3월 삼천포

고금도

9월 고흥군 내발리

1955

충무공 시비, 충무공 동상, 한산대첩비 세움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세움

충무공 이순신 동상 세움

발포 유적기념비

 

8월 통영시 남망산 공원

9월 진도 벽파진

12월 부산시 용두산 공원

고흥

1957. 6. 15

옥포 대승첩 기념탑

거제시?

거제시 아주동

1958

충무공 무술목 유적비 세움

이순신 영모비 세움

광주시 학동 무광사 세움

 

4월 돌산도

부산시 충무로

광주시 학동

1959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옥포 대승첩 기념탑 세움

 

1월 국보 제76호 지정

4월 거제 옥포리

1962. 3. 1.

현충사 경내 확장 및 유물신축

충청남도

 

1963

옥포정 완공

거제시?

거제시 아주동

1963. 4

충렬사 중건

 

정읍

1966. 4

현충사 성역화 사업 착수

문공부

4월


1. 구한말+일제시대
네~ 두 번째 글입니다. 이제 다음 글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부터 현재까지 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충무공에 대한 추모 사업은 구한말, 일제 시대라고 해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전의 조선시대 보다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니 활발히 진행되지 않고 명백히 줄어들었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조선시대와 빈도수를 '대략적'으로 비교했을 때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40여년 간 대략 4건이 있는데 이전 시대와도 엇비슷한 규모입니다.
(저도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일제시대임을 생각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많다고도 비교 할 수 있죠
물론, 제가 전국에 산재한 충무공 관련 자료들을 전부 뒤져본 것도 아니고
책과 인터넷에 의지하면서 발품을 뛰지는 않았으니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을사보호조약에 항거하여 현충사 유허비를 세우고,
동아일보(!)와 이충무공 유적보존회의 주도로 현충사가 중건하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현충사를 중건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쨌든 이미 일제시대 때 중건 됐었군요.

어쨌든 3.1 운동과 지속적인 독립의사들의 항거에 질린 일제는 조선인들의 구심점을 찾을 필요가 있었고, 암암리에 충무공 기념 사업을 지원해주면서,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한 것 입니다! (믿으면 정총장)


2. 그렇다면 해방 후는?
이제 반공 이데올로기에 앞장선 충무공의 행적-_-에 대해서 알아 봅시다.
당시 전세계 최빈국에 당당히 랭킹한 대한민국은, 뭐가 그리 좋은지 충무공에 대한 기념을 지속합니다.
아쉬울게 뭐가 있다고...

46년 김구 선생의 자필로 비가 세워지고, 50년에는 진단학회가 기념 논문을,
전쟁 와중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이충무공동상이 세워지고
국민의 성금으로 온양역에는 비각을 세웁니다.

뿐만 아니라 1, 2년 꼴로 각종 비와 탑, 영모비, 동상이 세워집니다.

과연, 이 정도면 충분히 반공 이데올로기에 동원되었다고 설명이 가능하겠습니다.


마지막 회가 올라오시면 아시겠지만, 충무공을 기념하는 일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마 한민족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겁니다.

1명이 역사를 바꾸고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인데,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해방 ~ 박정희 집권 전 이순신 동상 건립 건수
진해 충무공 이순신 동상
통영 충무공 동상
부산 충무공 이순신 동상

3건


낚이면 지는 차회 예고 : 군부 독재를 정당화하고 민주화를 가로막은 충무공 이순신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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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영웅 이순신[1/3] : 조선시대 행해진 충무공 추모 열풍

by zert | 2009/11/09 17:38 | 무적조선수군 | 트랙백 | 핑백(1) | 덧글(25)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1/3]
※ 일러두기
사적이나 기타 유물, 유적 지정은 제외했습니다.

충무공 사후부터 시작된 증직, 추증, 사당, 동상, 비 등에 대해 주로 적었습니다.

비어 있는 공란은 제 능력이 모자라서 미처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기와 왕들의 연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목 :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1/3)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 열풍(1/3)
1회차 : 조선시대~1900년

1. 이글루스의 음모 때문에 본의 아니게 본문이 나뉘어지게 되서 쓰게 된 서론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영웅화와 성웅화, 성역화는 흔히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모 대통령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과연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그 사실을 <입증>할 필요성을 느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에 대해 접근하려면 사료적인 접근이 필요하겠죠.


조선시대~1900년


일시

행한 일

주관

비고

조선시대

1598. 11 (선조31)

이순신 등 공을 세운 장수에게 증직지시

선조

장례 지시,

이순신 아들에게 관직제수

1598. 12 (선조31)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

비변사

장례 완료/관직제수 완료

1599. (선조32)

의정부 우의정 추증

 

 

1601. (선조34)

여수 충민사

통제사 이시언

왕명, 

이항복 현지시찰

충무공 관련 사액 사당 1호

???

석천사(石泉寺) 건립

승려 옥동

여수 충민사 수호 사찰

1603 (선조36)

타루비 건립

수졸

수졸들의 자발적 건립

1604 (선조37)

선무공신 1등, 덕풍부원군 추봉, 좌의정 추증

 

 

1606 (선조39)

통영 충렬사 건립

통제사 이운룡

왕명

1615 (광해군7)

여수 전라좌수영 대첩비 세움

 

 

1632 (인조9)

초사(草舍)를 세움

남해인 김여빈, 고승후 등

 

1643. 3 (인조21)

시호(諡號) 충무(忠武)

 

이식이 서장을 씀

임금이 시호를 내림

1658 (효종9)

남해 노량에 충렬사 세움

통제사 정익

 

1659 (현종0)

초사 철거, 대사당 세움. 이충민비로 고쳐 세움

어사 민승중

통제사 정익에게 지시

1661 (현종2)

남해 노량에 묘비를 세움

우암 송시열

 

1663 (현종4)

노량, 통영 충렬사 사액(賜額)

현종

현판을 내림

1688 (숙종14)

해남-명량대첩 비 건립

전액 : 사포 김만중 씀

문장 : 이민서

글씨 : 이정명(해서체)

근정전에 있었으나 광복후 지방 유지들이 되찾아 세움

1688 (숙종14)

해남-충무사 건립

 

 

1689 (숙종15)

정읍-충렬사 현판을 내림

숙종

 

1704 (숙종30)

아산 지방 유생들이 사당건립을 상소

아산 지방 유생

사당건립 상소

1706 (숙종32)

아산 현충사 건립

 

 

1712 (숙종37)

오충사 건립

 

해남 용정리

1722 (경종2)

유허비, 모충각 세움

 

목포 고하도

1731 (영조7)

월산사 세움

 

전남 함평

1739 (영조15)

제승당 유허비 세움

 

한산도

1742 (영조18)

이충민공비를 이충무공비로 고쳐 세움

5대손 호남절도사 이명상

 

1777 (정조1)

녹둔도 전승대비 세움

 

함경도 녹둔도

1781 (정조5)

전남 강진 금강사를 세움

 

현무공 김억추 배향-_-

1792 (정조16)

<<이충무공전서>> 편찬 지시

정조

 

1793 (정조17)

영의정 추증

정조

 

1794 (정조18)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 세움

정조

10월

1795 (정조19)

<<이충무공전서>> 발간

정조

9월

1832 (순조32)

이충무공 전몰 유허비

 

남해 관음포

1847 (헌종13)

오충사 건립

 정철(丁哲)의 후손 정재선

충무공을 주향으로 오충신을 모신 사당

1877 (고종14)

착량묘

10세손 통제사 이규석(李奎奭)

임진왜란 후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낸 것이 사당의 시초(1877년 이전)

1899 (고종26)

남해 충렬사에 청해루 중수

11대손 이민승

 




이상합니다....제 눈이 잘못 된 것 같군요.
원균 옹호론자들이나 충무공을 객관적으로 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이 성웅이 된 것은 박정희 시대의 일인데 아무래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사실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실록의 다른 기록도 찾아봤습니다.
일개 무장인 이순신에 대해 "이순신", "충무공"으로 검색하니 놀라울 정도로 많이 나왔습니다!



선조 106권,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에 관한 치계를 올리다
 
사관의 평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중략)....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4168) 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선조 107권,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7일 무오 5번째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다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장계에,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중략)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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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59권, 20년( 1744 갑자 / 청 건륭(乾隆) 9년) 2월 27일 을해 2번째기사
황해 수사 박문수는 황당선의 어로와 밀무역을 근절시키기 위한 계책 등을 아뢰다
  
황해 수사(黃海水使)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般)을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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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71권, 26년( 1750 경오 / 청 건륭(乾隆) 15년) 7월 3일 계묘 3번째기사
호조 판서 박문수가 상서하여, 용관을 줄이고 주현을 합치는 등의 변통론을 아뢰다
(중략)
"...또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고 못 얻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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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6권, 2년( 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6월 6일 신해 3번째기사
부사과 민정중이 왕도·외직 임용·언로의 확대·기강 확립에 대해 아뢰다


(생략)...이순신(李舜臣)의 경우는 본디 미관 말직이었고 권율(權慄)은 명망이 없었으니, 혹시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하급 관직에서 늙어 죽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들이 뛰어난 재주를 지닌 줄을 몰라 오늘날 그 이름이 소멸된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 권율과 이순신 같은 인재가 늙어 죽어가고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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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21권, 10년( 1659 기해 / 청 순치(順治) 16년) 윤3월 30일 경인 1번째기사
첨지중추 심광수가 근래의 재이에 대해 아뢰다

(전략) 상이 승지 이경억(李慶億)에게 이르기를,
“아침에 이순신(李舜臣)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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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1권, 8년( 1808 무진 / 청 가경(嘉慶) 13년) 1월 10일 정미 2번째기사
전 통제사 이당을 소견하고 통영의 폐단에 대해 순문하다

(전략) 임금이 말하기를,
 “이순신의 사적(事蹟)이 무슨 책에 있는가?”
 하니, 승지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손으로 조정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이인수(李仁秀)·이승권(李升權)이 모두 그 자손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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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38권, 17년( 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7월 21일 임자 1번째기사
충무공 이순신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한다고 전교하다


(전략)...또 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 공신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덕풍 부원군 행 정헌 대부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겸 삼도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하라.(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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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49권, 36년( 1710 경인 / 청 강희(康熙) 49년) 12월 17일 정축 2번째기사
전라도 고금도의 관왕묘에 진인과 이순신을 향사하는 일을 논의하다
(전략)...조정에서 또한 오히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이순신의 공로(功勞)는 국조(國朝) 이래로 없던 것이었으니, 비록 사묘(祠廟)에서 거행하는 향사(享祀)라 하더라도,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는 것이 숭배하여 보은(報恩)하는 도리에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후략)



"(중국의) 옛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충무공 이순신은 어려운 가운데에세도 배를 만들고 적을 쳐부쉈는데..."
"이순신의 공로는 국조 이래로 없던 것"
"적을 막는 것은 사람을 얻고 못 얻고에 달린 것 입니다....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1회차 본문 요약 : 조선왕조실록이 잘못 되었겠죠.

다음화 예고 :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앞장 선 충무공 이순신 ㅡ.ㅡ


PS : 직산대첩 본문 1을 올리기 위한 웜업^^


 



사당 건립에 대한 것은 시간관계상 네이버 백과사전으로 대체ㄳ(클릭^^)
by zert | 2009/11/07 21:22 | 무적조선수군 | 트랙백 | 핑백(2) | 덧글(38)
[명량대첩] 명량대첩의 전개와 의의

본문 소개 : 충무공은 항상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나 님이 지휘하면 싸워 이길 수 있음. 깝ㄴㄴ"
본문 소개 : '사람 한 명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의 증명. 무기체계는 결국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1. 서  론


2. 본  론
1) 명량해전의 개요
2) 조선의 무기체계
3) 조선수군의 편제
4) 일본의 무기체계
5) 일본함대의 편제
6) 전  개   과  정
7) 일 본 의  피 해
8) 의           의


3. 결  론

 


1. 서  론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에서 3대 대첩이라고 하면 ‘한산대첩’, ‘행주대첩’, '직산대첩', ‘노량대첩’ 등을 꼽는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그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로 이순신 장군은 한민족에게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아왔다. 그러한 존경과 추앙의 분위기가 그것이 현대까지 이어져 우리에게 임진왜란 이라는 전쟁이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실질적인 심도 깊은 연구와 본격적인 연구가 제대로 된 경우는 드물다. 충무공과 임진왜란을 '알고' 있는 것과 심도 깊게 아는 것은 별개라는 소리이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사료와 자료가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전산화되는 작업이 근래에 와서야 시작되고 정착되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문헌과 자료에 의지하던 종래의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비판 받거나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에 당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각종 전쟁사에서 역사학을 전공으로 하는 연구자가 실질적으로 전무하다시피하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지엽적이거나 피상적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한 이른바 ‘대첩’이라는 분류도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히 일반화된 사실들을 통하여 추론 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수정되고 변화가 되어야함은 물론이다.

여기에서, 명량해전에 대해 알아보고 그 과정과 의의에 대해 논하면서 명량해전에 대한 재조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2. 본   론

1) 명량해전의 개요
명량해전은 1597년, 선조 30년이자 정유년 9월 16일에 하루동안 발생한 전투이다. 9월 16일 오전에서부터 오후까지 한나절 가량 지속된 캐사기 전투로 이에 대한 의의에 대해서는 뒤에 논하겠다.

명량해전에 대해 논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보아야 할 것이 당시 사회의 분위기이다. 현대인들은 이순신 장군이 ‘당연히’ 이겼음을 알고 있고 명량해전이 막연하게 ‘10대 1’의 전력차를 극복한 전투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과연 조선 수군이 승리하리라 생각했으며 기대했을까?

당시의 시대 분위기는 실록과 각종 문헌집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실록에 보면 직산전투 이후 ‘도성이 텅 비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충청-경기 일대까지 접근한 일본군 때문에 혼란에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애초에 수군에 대한 기대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8월 중에 수군을 해체하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하지 않았는가? <상식적>으로 보면 그것이 옳은 판단일 수도 있다.
어쨌든 칠천량에서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임금이 후궁과 왕자들을 피난시키려고 하자 그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논쟁이 이루어지고, ‘대소신료들의 가족은 피난했는데’ 어째서 왕실이 피난 가는 것을 반대하냐는 멋진 임금의 반박도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의 정치적, 외교적 회피술책으로 인하여 직산전투가 명량해전 이후에 어느덧 직산대첩으로 둔갑하는데, 우습게도 직산전투 이후에도 여전히 도성은 피난 분위기였다. 즉, 충무공과 조선수군이 진도에서 싸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승첩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에서도 ‘10여척의 이빨 빠진 조선수군’을 신속히 격파하고 서해에 진입하여 충청도에 대기 중이던 육군에 보급을 하려하고 있었다. 물론 명량해전 전까지 조선수군의 잔여 병력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아 일본군도 과감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지만 조선수군의 잔존 병력이 얼마 되지 않음을 짐작하고 있었고, 명량해전 즈음에는 조선수군의 전선 보유 척수까지 대강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전투 이틀 전인 14일자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 역시 조선수군과 싸워 진다거나 혹은 고전할 것은 전혀 계산하지 않았고 충청, 경기에 전개 중인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에 보급을 하는 것에 신경쓰고 있었다. 사실 고작 13척의 배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조선 정부에서도 수전에서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아 수군을 전폐하고 육전으로 싸우라는 지시를 8월 중에 내리기도 한다. 옳은 판단이다. 아무리 막강한 판옥선이지만 고작 10여척의 배로 왜선 1000여척을 상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 남원성 전투 이전에 일본군이 전투에 투입한 전선 수는 오차가 있지만 일본군이 남원에 5만여명의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믿었듯이 당시 일반인들ㅡ어쩌면 충무공도ㅡ왜선 1000여척이 온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사실 아주 거짓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전투 경험이 많은 수군을 육군으로 전환해도 될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는.

그러나  충무공은 “지금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유명한 장계를 통하여 수전에서 싸울 수 있음을 주장하고 전투준비를 하기에 이른다. 애초에 상식적으로 행동 할 것이었으면 싸우러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다.

여기까지 알아보았을 때 당시에 조선수군의 승리는 고사하고 패배가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조선이라는 국가가 전쟁에 패배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은 당시 모친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는데, 당시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이는 간단하게 통제사 임명을 거절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만약에 그가 통제사 제수를 거부하였다하더라도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실제로 한산도가 무너진 (이른바 칠천량 패전)이후로 조정에서 장수들에게 싸울 것을 임명하지만 병이나 각종 이유를 핑계로 혹은 부임지에 가지 않거나 도망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참전을 거부한다.
반면에 이순신 장군은 거절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참전을 거부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질병이라는 궁색한 핑계가 아니라 <모친 상 中>법적, 도덕적인 완벽한 근거가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때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친 조정의 명을 받아 싸움길로 나선다.
싸우지 않아도 될 법적, 도덕적 근거가 완.벽.히. 있는데도

[이런 사람이 영웅이 아니고 성웅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영웅인가? 여기서 어떻게 "만들어진 영웅"을 감히 운운 할 수 있는가?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할 예정이지만 임진왜란 이후, 특히 정유년 이후와 충무공 전사 이후 수백년간 공은 이미 한민족의 영웅이었다. 일부 정권이 충무공을 띄워준게 아니라 한민족 내부에 자리잡은 충무공의 명성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2) 조선의 무기체계
한민족은 반만년 역사 동안 항상 화포덕국 조선의 경우 장거리 투사 무기의 발달로 인하여 우수한 성능을 지닌 활과 총통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민족의 뛰어난 활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하고, 당시 명나라인들과 일본인들도 알고 있었다. 더욱이 포방부의 주도로 각종 논의 끝에 총통으로 대표되는 화포덕국 역시 발달해 있었으며, 이러한 무기체계가 판옥선이라는 전함과 결합되자 상상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① 판옥선

조선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은 아이러니하게도 선조 이전의 임금들이 왜구들에 시달리자 그에 따른 방책으로 나온 전투함이다. 일반적인 대맹선을 더욱 크게 만들고, 그 위에 판옥을 올려 노꾼들을 보호하였다.
일본의 주력 전선인 세키부네는 이 보다 홀수선이 낮아 판옥선에 접근하여 선상백병전을 수행하려면 사다리를 통해 올라가야 할 정도였다. 또한 각종 총통과 화살로 무장함으로써 백병전 이전에 적을 제압했다.

함포사격을 위주로 하는 근대해군과 선상백병전을 중심으로하는 중세해군의 싸움.
사실, 조선수군이 그동안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래서 <지휘관>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망각한 체 통제사가 바뀌었다. 그리고 나라 멸망 직전까지 간다.

② 장거리 투사무기
‘조선은 활의 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에는 활을 중시하였다. 궁시는 무과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고 사대부들의 필수교양이었다. 실제로 선비 서너 명이 활을 통한 유격전으로 일본군 일개 중대를 저지하고 돈좌시킨 경우도 있으며 수전에서도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부(射夫)라는 직책이 있었다.
또한 화포덕국조선 초기부터 발달한 화포무기 역시 수전에서 쓰였는데, ‘천지현황’자 총통들이 있었으며 이것을 다루는 화포장, 방포장 등이 편제되어 있었다.


최근 밝혀진 실험과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수전에 있어서 롤링, 요잉을 고려하여 조선수군이 정확한 명중률을 보장하려면 그 유효사거리가 300미터 이내라는 결과가 밝혀졌다. 이는 문헌적 근거를 토대로 한 것으로, 물론 조선 수군이 함포전을 주력으로 하였지만 선상백병전을 수행할 능력 역시 구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절망적인-_- 조선군의 재장전 시간을 고려했을 때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함포전이 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수군은 꾸준히 적과 접현전을 벌였고, 최소한 조총으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물론, 조선수군 사망 원인 1위는 이순신이다.


3) 조선수군의 편제
난중일기와 실록의 기록, 장계와 각종 문헌에서 직접적으로 확정 할 수 있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총지휘관 :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중군장 : 미조항 첨사 김응함
거제 현령 안위
평산포 대장(代將) 정응두
영등포 만호 조계종
조방장 배흥립
전라우수사 이누야사 김억추


이상 13척
+ 피난선 다수(100여척 추정)

이들을 비롯한 총 13척의 전선이 동원되었으며 세간에서는 앞에서의 충무공의 장계에 따라 12척이 삼도수군의 전부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배를 끌고 온 시기를 보았을 때 13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충무공을 따라 종사한 장수들의 가문 기록에 보면 피난선을 꾸며 의병(疑兵)의 역할을 했다고 하며, 또한 각종 기록에서도 피난선을 의병(疑兵)으로 활용했다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정작 난중일기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설사 실시했다고 해도 판옥선 보다 체급이 작은 피난선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 할 수 있었는지는 기대하기 힘들다. 일단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 중군장의 역할
: 중군장의 역할은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휘하 장수들에게 전파하고 지휘,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항상 좌선(坐船) 근처에서 지휘관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 중군장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시라!]


4) 일본의 무기체계
① 철포(조총)

조총이 일본의 전국시대부터 도입되었지만 그것이 가공할만한 힘을 지닌 공전절후의 무기는 아니었으며, 조선에 전혀 생소한 공전절후의 비밀무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조선의 남해안 지방은 조총을 활용하는 왜구들과 교전한 경험이 있었고, 북방에서 야인들이 조총을 활용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차원에서도 조총의 존재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다만 조선이 조총의 존재를 등한시한 것은 이미 조선군 자체에 총통이라는 편제화기, 개인화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며 조총보다 사거리와 살상력이 뛰어난 활이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결국 보편화, 양산이 쉬운 조총에 활은 그 자리를 천천히 내주게 된다.)

그러나 판옥선이 조선의 비밀무기가 아니었듯이 단순히 상대방의 무기체계를 알기만한다고해서 그것에 대한 방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양 국가는 서로의 무기체계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② 장창
일본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세계 보병들의 주력 무기는 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로마군단도 글라디우스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창이 주력 무기였으며 글라디우스가 보급되어도 창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또한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일본에서 철포병(조총병)의 비율은 비용측면 때문에 10~30퍼센트 사이에 있었고 장창병들의 비율은 30퍼센트 이상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장창의 경우 유달리 긴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창의 길이가 4미터인 경우에 반해 일본의 장창은 평균 5~6미터의 길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창으로 찌르는 것 뿐만 아니라 내려치는 전술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구와 일본도의 이미지와 인식 때문에 당시 기록에서도 일본의 장창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③ 세키부네
일본이 통일이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의 일로 중앙집권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1세기가 흐른 상태였다. 따라서 중세 지방영주들로 볼 수 있는 다이묘들에 의한 영주국가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집권화 된 관료 국가 조선에 비해서 군사제도와 무기체계 면에서 통일되지 않고 지방적인 특색을 보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마찬가지로 세키부네의 경우에도 그 규격이 통일되지 않아서 조선 측 기록에서 안택선으로 혼동할 만한 세키부네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수군의 전술은 어디까지나 선상백병전이었고 세키부네 역시 그러한 것을 고려하여 제작된 전선이다. 실제로 판옥선에 대한 대비책으로 판옥선급 세키부네가 후기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조선수군의 교리와 전술까지는 따라하기 힘들었다.


안택선이 일본수군의 주력전선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기록들을 살펴보면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안택선은 일본수군의 주력전함인가? 참고)


5) 일본함대의 편제
실질적으로 현대인의 오해와 달리 일본함대는 단순히 일본 수군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근대 해군이 성립되기 이전에 보편적인 현상으로 단순히 일본에만 국한된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에 의해 규격화된 전선과 무기체계, 장교,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는 조선이 당시대에 걸맞지 않은 근대 해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기간 동안 벌어진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것은 일본 수군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해적, 육군 수송함대, 수송선 등이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가토 기요마사나 고니시 유키나가 소속의 배가 해전에 참가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사료도 있다(이하 일본함대라 칭함)

그렇기 때문에 명량해전에서 동원된 일본함대는 내도수, 마다시로 알려진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부대 뿐만 아니라 간양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배로 무안으로 간 자’와 혹은 기타 기록에서 명량해전에 참전했을 것으로 보이는 무장들을 포함했을 때 도도 다카도라를 비롯한 남원 전투에 동원된 수군 소속 무장과 육군 소속 무장 등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으며 기타 순수 수송선 200여척이 참여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명량해전이 그 전개 과정과 결과에 비해 연구된 바가 적고 임진왜란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록 대다수가 한국에 있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명량해전에 어떤 영주들이 출전했는지 정확하게 규정을 지을 수 없다.

또한, 일본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도 논란의 요지가 존재한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토대로한 기존의 정설은 ‘133척’이 적선의 규모이다. 그러나 명량대첩비의 300여척과 1000여척의 적이 몰려오고 있다는 과장된 소문까지 미루어 보았을 때, 또한 정유년 당시 상기에 명시한 영주들이 동원한 병력과 동원 가능한 척수를 고려해 보면 300여척(순수 수송선 200척 제외)의 적선이 명량해협으로 오지 않았다고 단언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충무공전서에도 나오는 400~500여척의 숫자는 비록 피난민들의 증언이긴 하지만 단순히 과장된 숫자라고만 판단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300여척 모두 수전으로 동원된 배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판옥선에 '올라가서' 싸워야하거나 조총이나 활을 쏴야하는 것은 일본수군이나 일본육군수송함대나 똑같다.


6) 전개과정
한산도에서 조선수군이 무너진 소식이 도달한 이후 이미 권율은 이순신에게 비공식적으로 수습을 부탁하였고, 조정에서는 7월 23일 삼도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교서를 작성하였다. 이 교서를 8월 3일 이순신이 받아 보았고 그 직후부터 공식적으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게 된다.

이후 이순신은 8월 말까지 전라도를 순찰하며 병사들을 수습하고 화약과 각종 군기를 모은다. 그리고 9월 초부터 14일까지는 벽파에 진을 치면서 일본군과 신경전을 벌이며 소규모의 자잘한 전투를 치룬다.

이후 15일에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기고, 그 이튿날인 16일에 명량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따라서 철쇄아 철쇠사슬을 설치할 시간적, 인적 여유도 없고 무엇보다 쇳덩이도 없다-_- 철쇠사슬에 관한 떡밥은 워낙 많은 곳에서 논파 되었으니 생략하겠다]

먼저 명량해전에 대한 가장 신뢰성이 높고 정확한 기록인 난중일기를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보도록 하겠다.

'진도대교'는 현재 진도와 화원반도를 잇고 있다. 진도대교에서부터 진도의 벽파 사이의 울돌목에서 명량해전은 일어났을 것이다.



- 130여척의 배가 에워쌌다
→ 이 부분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은 진도 앞의 울돌목이 아닌 전라우수영 앞이나 혹은 양도와 진도 사이의 바다에서 전투가 치러졌을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울돌목의 물살은 때에 따라서는 11노트에 다다르며, 정확한 연구와 실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단순 추정에 불과하지만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속도가 4노트임으로 울돌목에서는 싸울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해류의 속도와 전선의 속도에 무조건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징비록이나 다른 기록들에 의하면 ‘조류를 이용했다’는 식의 기록이 있다.
결정적으로 당시의 기록은 울돌목이 아닌 오히려 그 앞 바다라고 할 수 있는 벽파정, 진도 앞바다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후에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1마장 뒤에 물러선 삼도수군, 그리고 2마장은 더 뒤에 있는 우수사 김억추의 전선이라는 표현이 난중일기에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우수영 앞바다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양도와 진도 사이의 넓은 면적을 상선 혼자 감당하기에는 다소 벅차다.


-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 보고는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 흔히 명량해전은 일자, 혹은 학익진으로 늘어선 삼도수군 13척이 해협 돌파를 시도하는 왜선 2~3척을 각개격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인의 오해와 상상과 달리 당시의 참전자인 이순신은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 해전사를 통틀어 명량대첩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어쨌든, 적들이 몰려 오는 것을 본 장수들이 오히려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 ‘명량해전은 철쇠사슬로 이겼다.’라는 문헌적 근거는 20세기에 지어진 이른바 김억추 행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나마도 ‘공이 칼을 휘두르자 왜선 수백척이 깨졌다.’라는 식의 사료적 근거와 신뢰성이 대단히 떨어지는 기록이다. 당대의 그 어떠한 문헌에도 철쇠사슬을 사용했다는 근거는 없다.


-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 부하들이 뒤로 물러서자 대장선인 상선(上船)이 앞으로 나아가며 해협을 가로 막게 되는 것이다. 

..........
그저 존경할 뿐. 뭐라 표현하는 것 자체가 공에 대한 모독이다.



- 탄환이 폭풍우 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 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 이때 구루지마 함대가 돌파를 시도한다.


 -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아무리 충무공이 지휘하는 강력한 판옥선이더라도 적선에 둘러쌓여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 자칫 전장공포로 인하여 부하들의 전투의지가 붕괴될 시점에서 충무공이 독려를 하는 시점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지휘관의 역할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부하들의 전투의지를 어떻게 고양하고 유지한다는 역할은 변함이 없다.


-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 하였다.
→ 이것이 드라마나 세간에서의 인식과 전혀 다른 기록에서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충무공의 성품은 공명정대하여 임진년 때부터 공을 세운자는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분명하게 기록하여 알렸다. 그런데 상선 혼자 싸우는 현 시점까지 부하장수들이 도왔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1마장(1킬로미터 남짓한 거리) 밖에 물러서 있었고 그나마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보이지도 않았다.


-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 또한, 다름 아닌 ‘중군장’이 통제사 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부하장수들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조선시대에서 중군장의 역할은 총지휘관을 보좌하고 명령을 통하여 직접적인 전투를 지휘한다. 뿐만 아니라 총지휘관 곁에서 총지휘관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중군장이 상선 곁을 떠나있었다는 것이야 말로 수군이 명령 없이 뒤로 물러선 것을 뜻한다.


-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 ‘초요기’란 휘하 장수들을 부르는 깃발이다. 이에 머뭇거리던 부하들 중에서 거제 현령 안위가 가장 먼저 왔고, 중군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낀 김응함이 왔을 것이다.


-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였다.
→ 어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여 안위를 겁 많고 비루한 인물로 만들었지만, 12척의 전선 중에서 가장 먼저 싸움에 복귀한 것은 거제 현령 안위이다.


-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어느 부분에서도 12척의 배가 작전상 후퇴했거나 솔선수범하여 부하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맥락을 찾을 수 없다. 중군장으로서 물러난 것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을 묻고 있으며, 상선이 불가피하게 해협을 틀어막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추측과 짐작-_->대로 충무공이 사기를 고양하기 위해, 혹은 작전상 선두에 섰는데 나중에 안위에게 군법에 죽고 싶냐느니, 중군장에게 목을 벤다더니 한다면....충무공은 그야말로 정신병자이다ㅡ.ㅡ 선조 임금이냐? 가토 기요마사 잡으러 안갔다고 말도 안되는 생트집을 잡은 것처럼? 이렇게 사료를 보면 추측과 짐작이 무너진다.]

-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시하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 하여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였다. 안위의 격군 일고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멩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 거제선이 위험에 쳐했지만 이순신이 탄 단 한 척의 판옥선도 쓰러뜨리지 못한 일본함대로서는 본격적인 패배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 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代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왜인 준사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미치후사)입니다."하고 말했다.
선두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펄쩍 뛰면서 "정말 마다시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드라마에서와 달리 전국시대 일본의 직급이 높은 영주는 결코 전선 앞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상황이 유리하거나 반대로 부하들을 독전할 필요가 있을 때 직접 나가는 경우는 존재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일이다. 지휘관이 가장 앞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누가 부하들을 수습할 것인가? -_- 영주가 죽으면 실업자가 될 수도 있는데?)
즉, 가장 안전하고 후미에 있어야 하는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죽었다는 것은 휘하 병력의 궤멸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일본 함대 전체에서 선봉이 궤멸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올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 다시 말하지만 명량해전이 수전(守戰)이라는 오해와 달리 초기의 상선 혼자 해협을 지킬 때를 제외하고는 조선수군이 공세적으로 적들을 공격하였다. 당대의 자료들을 찾아보았을 때 ‘주사(舟師)가 뛰쳐나가 적들을 분멸하였다.’라는 식의 기록이 보인다.
이제까지 겁을 먹었던 아군들이 드디어 용기를 얻고 휘하의 전선들이 해협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 조선수군이 완전히 공세적으로 돌아섰음을 의미한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 실록에서는 20여척, 난중일기에는 31척으로 되어 있으나 앞에서 추론한 적선의 동원 규모는 300여척이 넘고 난중잡록에서 ‘살아 돌아간 배는 10여척’을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았을 때, 순수하게 완전히 깨트린 전선이 30여척이라면 납득이 가능한 숫자이다. 또, 난중잡록에서의 기록도 순수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배만 10여척이라고 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근거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하겠다.


- 싸움하던 바다에 그대로 정박할까 싶었다. 그러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서 우리 편의 형세가 외롭고도 위태로운 듯하여 당사도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 마침내 명량해전이 종료되었다. 명량대첩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7) 일본의 피해
앞에서도 논했지만 순수하게 침몰시킨 배만 31여척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선 조선수군이 수세 중에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함대가 전멸하였고, 안위를 비롯한 아군 장수들이 뛰쳐나가면서 일본 함대 전체에 큰 피해를 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명량해전 당시 일본 수군의 총대장이었던 도도 다카도라가 부상을 입었으며 군감이 물에 빠져 구조될 지경이었다.
위에서도 제시했지만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야하는 총대장과 군감이 부상을 입었고 구조 되었다는 소리는, 본진이 조선수군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왜 수군이 궤멸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8) 의의
혹자는 ‘직산대첩’을 근거로 명량해전과는 별개로 이미 일본군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한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직산대첩’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으며 도성 방어에 대한 논의를 해야 했다. 더욱이 왜군이 직산에서 ‘패배’하였지만 오히려 후퇴를 가장한 기만책을 하고 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실질적으로 직산 인근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전개되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를 더욱 끌어들이면 포위 섬멸이 가능한 위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정부가 의심을 한 것은 타당하다. 실제로 명량해전 즈음까지 일본군은 경기도 인근과 충청도에 여전히 전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량에서 승리가 보고 된 이후에 선조의 행동을 보면 참으로 역설적으로 명량해전의 의의를 알 수 있다. 명량해전 이후에 선조는 갑작스럽게 ‘직산대첩’에 참가한 명나라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감사인사 순례를 다닌다. 조선수군의 승리를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정치적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한심한 행태라고 볼 수 있다.(관련 포스팅은 추후 연재하겠습니다^^;;)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년 11월달에 명나라 군대에 선조가 보낸 글에서도 ‘작은 승리로 적봉을 조금 좌절’이라고 평가 절하하면서 바로 뒤에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명량대첩의 결과로 충청도 인근에 전개된 일본 육군으로 해로수송이 좌절 되었으며 이로 인한 한성 공략 역시 좌절되었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9월 16일 이후에 일본군은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모습을 보인다[전략적 기동으로 보이는 퇴각하는 모습은 16일 이전에도 분명 있었다]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에 버로우주둔하게 된다.

명량해전 이후로도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입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일본군의 서해 진입은 그 역할을 잃었으며 고금도와 보화도에서 재건한 조선수군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무술년에는 조선수군의 힘만으로 전라도 대부분의 지방을 탈환하게 된다.

더욱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패전, 패망, 패국으로 가던 분위기를 일거에 쇄신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병을 핑계로 혹은 임지에 가지 않아서 싸우는 것을 꺼리는 무관들을 다시 싸움터로 보내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가장 큰 의의는 비로소 싸워야만 1퍼센트의 승산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아무리 미사일 몇 발로 지구가 멸망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결국 지휘관의 전투의지만큼은 어느 시대나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3. 결   론
지금까지 살펴본 봐와 같이 명량해전은 그 중요성과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전투이다. 오히려 막연한 인식이나 오해를 통해 잘못 알려진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명량해전을 통하여 우리는 단 1명의 용기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단순히 뛰어난 무기체계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화포가 발달하고 전함이 일본보다 우세한 조선수군이 해전에서 일본을 일방적으로 이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다. 어쨌든 양이 이끄는 사자떼는 사자가 이끄는 양떼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명량대첩은 한산대첩 이상의 성격을 지닌다. 한산대첩이 본격적인 일본 함대의 투입을 좌절시키고 일본의 해전 포기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면, 명량대첩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모두가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싸움에 임하여서 국가와 민족을 구했다는 것에 그 의의를 갖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일본함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해로 진입하였다면 증강된 병력과 보급을 받은 일본 육군이 이후에 어떻게 진격했을지는 상상이 가능하다.

명량해전, 명량대첩은 ‘철쇠사슬’이나 ‘강강수월래’ 같은 전설이나 민담에 기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신뢰성 있는 기록과 자료를 통하여 그 진실에 접근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은 문치국가인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쟁이고, 조선의 다양한 식자층과 백성들은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비단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당시의 관료였던 이들이 남긴 신뢰성 높은 기록과 문집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충분한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

이러한 연구는 임진왜란에 잘 알려진 전투들뿐만 아니라 다른 전투를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과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문 요약 : 명량대첩은 일본군의 퇴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다.


PS
0. 전사자 적기로 악명 높은(?) 조선수군-_-
한나절 가량 해협을 틀어막은 상선에서 사상자 2명 발생-_- 정말 더럽게 안죽는 부대입니다-_-

1.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연구된 논문이나 서적에서도, 충무공 이순신이 홀로 해협을 틀어막았다는 것을 인정-_-하는 것을 찾기 힘듭니다. 그렇게 주장하면 "또 이순신 띄워주기 ㅉㅉㅉ", "객관적-_-으로 역사를 보자"라는 분위기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충무공의 역할을 쉽게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인지...

2. 어쨌든 명량대첩은 충무공이 지휘한 대부분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결국 공세전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통제사께서 '요란 법석을 떨었다'고 적었으니 그야말로 일본함대는 불벼락, 화살벼락을 맞았을 겁니다.

3. 사실 조선 정부도 명나라도, 일본도 조선수군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외국인 신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강했는지에 대해서 한참 잘못 짚고 있었죠.
판옥선이 크고 견고하고 단단해서. 왜선이 허접해서. 총통과 활이 강하니까...원균이 용감해서 등등
이래봤자 무능한 지휘관이 지휘하는 현대의 군대라도 유능한 지휘관이 지휘하는 어린이들과 싸워도 질 수 있는 겁니다. 무수히 많은 역사에서 너무나 많이 확인한 진리입니다.

"이순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조선 수군을 지휘했다면 그 정도는 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 사람 군대에 안가봤거나-_- 역사 공부 제대로 안한 사람입니다.

4. 하고 싶었던 명량대첩에 대한 글도 올렸으니, 이제 마음 편하게 직산전투에 대해 써야겠군요~_~

by zert | 2009/11/02 18:54 | 무적조선수군 | 트랙백(4) | 핑백(1) | 덧글(180)
[직산대첩 연재] 본론 : 직산대첩? 직산전투!

본론 : 직산대첩? 직산전투!
부제 : 조선수군이 물 마르듯 도망가면서 정유재란이 시작되다

 

일단 직산‘대첩’이 어째서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알려면 어떻게 정유재란이 시작되었는지 알아봐야하죠.
직산전투에 대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정유재란의 발발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정유년에 충무공이 파직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임명된 통제사 원균은 종전의 자신의 주장과는 다르게 제대로 출전하지도 않고, 사관들이 ‘드디어’ 원균이 출전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질질 끈 다음에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개전 이후 최초로 판옥선을 왜군 30여명에게 빼앗기는 치욕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그것도 나무하던 왜군에게 말이죠.(자세한 포스팅은 을파소님의 '구타유발자'를 참고하세요+_+)

더욱이 원균은 수륙병진전략을 할 수 있다 호언장담하여 통제사에 기용되었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통제사가 된 이후에는 출진을 하지 않아 조선-명나라군의 전략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가덕도와 안골포를 육군으로 점령해달라는 헛소리를 하고 말이죠. 차라리 부산포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대마도에 항공폭격을 해달라고 하시지.
어쨌든 일본 영주들은 그들대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부산포로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조선수군 때문에 전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었죠(.....)
더욱이 '한산의 무너짐' 직전 부산 근처에서 조선수군이 너무 강해보며 일곱 군감이 후퇴를 계획햇다는 귀환한 포로의 증언도 있습니다. 원균이 제대로 작전수행을 했으면 정말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부분이죠.

하지만 역사에서 if는 무의미합니다. 우리 모두의 희망과 다르게, 원균은 작정이라도 한 듯 엉망인 지휘를 합니다. 

어쨌든 선조 임금도 “이번에도 제대로 못 싸우면 법과 내 이름을 걸고 가만두지 않겠다.”라면서 협박하고(이러면서, 나중에 조선수군이 증발하자 "독촉한 권율 책임"이라면서 책임을 떠넘깁니다.), 원균 스스로도 이대로는 안된다싶어서 출진하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20여척의 판옥선을 풍랑으로 날려버립니다. 그로인하여 드디어 곤장까지 맞게 됩니다. 각종 기록들을 참고하면 권율에게 2번 곤장을 맞은 것 같고 그 중 한 번은 통제사가 직접 맞은 듯 합니다. 품계가 종2품 가선대부이며 영감이라 불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스타일 한 번 제대로 구긴거죠. 애초에 구길 것도 없었지만. 

그래서 7월 중순. 가덕도와 칠천도 그리고 대망의 춘원포를 비롯한 곳곳에서 며칠간의 이른바 ‘칠천량 해전’으로 인하여 조선 수군은 ‘전멸’하기에 이릅니다. 아, 전멸이라고해서 무개념헛소리쟁이 김식의 보고처럼 조선수군이 죽은 것은 아니에요. 충청수사 최호,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이 분전하여 전사하셨지만 실질적으로 조선수군 대부분은 원균의 인도하심을 따라 춘원포에 상륙했죠. 그리고 원균 생애 최초 그리고 최후의 진두지휘-_-를 합니다. 

통제사 원균이 배를 버리고 가장 앞장서서 도망쳤죠.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도 그렇고, 임진왜란 내내 조선군도 그렇고 사실 싸우다 죽은 군인들은 별로 없죠. 네, 결국 ‘조선수군 역시 조선군’이라는 평가를 들었을 겁니다. 춘원포에서 ‘한산이 무너질 때’ 죽은 줄 알았던 장수들이 다 살아돌아오니 말 다했죠. <해소실기>를 쓴 김완 장군 역시 무술년에는 귀환합니다. 물론, 일본군과 추격전을 벌이면서 체력이 모자란 수군이 죽었을 수는 있겠죠. 어쨌든 싸우다 죽은 수군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의 군관과 병사들은 ‘물이 마르듯 다 도망’쳤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을 통제사에 재임용하는 교서에도 ‘흩어진 수군을 다시 모으고’ 운운하죠. 

더욱 자세한 포스팅은 을파소님의 '칠천량 해전'을 참고하시고요^^ 

어쨌든 일본군의 전진을 막고, 지난 6년 내내 일본군 전체를 굶주리게 했던 그 무서운 조선수군이 드디어 무너졌습니다. 한산이 무너지자 조선과 명나라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입니다.  

이제까지 전라좌수사 혹은 통제사가 쓸데없이 빈 배를 부순다, 부산포를 공격하지 않는다, 대마도를 공격하지 않는다, 일본 본토를 공격하지 않는다면서 근거 없는 비난을 하거나 수군이 강한 것은 우수한 무기체계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거나 통제사가 괜히 백성들을 힘들게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많은 양반, 식자층 그리고 백성들은 정유년 7월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물에 빠져봐야 공기의 소중함을 안다고 하죠?

예, 일본군이 전진을 시작하자, 하삼도가 어륙이 되자 드디어 사람들은 충무공 이순신이 견내량만 틀어막았던 것이 아니라 일본군 전체를 부산에서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는 걸 드디어 제대로 인지한 거에요. 사실 충무공 왕년에의 부산포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선수군이 두들길 수 있는 곳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으니까요.

어쨌든 그 악명 높은 조선수군이 결국 겁쟁이 조선군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전부 도망쳐 사라진 지금 일본군은 드디어 서진, 북진을 하게 됩니다. 사실 정유재란은 조선수군이 춘원포에서 대도주를 한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봐야합니다. 일본 영주들은 전쟁 자체에 회의적인 분위기였다고 하고 ‘비록 이순신은 없지만 그래도 조선수군’이 버티고 있으니 전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괜히 요시라와 고니시가 반간계를 썼을까요? 

어쨌든 원균 덕분에 정유재란은 시작되었습니다.  

7월 중순 한산도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드디어 진주를 함락시키고 8월에는 남원을 무너뜨립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계획도로 경상도, 전라도를 천천히 석권하는 거죠. 

그리고 9월 7일. 명군 부총병 해생이 이끄는 4천여기의 기병과 구로다 나가마사를 비롯한 일본군이 직산에서 조우하게 됩니다. 이들의 동쪽인 죽산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1만여의 군세가 있었죠. 또한 모리 히데모토 군이 이동 중이었습니다. 

명나라 군대는 측면을 노출한 채 전투에 임하게 됩니다.


 

[직산대첩 시리즈]
서론 : 직산대첩?
본론 : 직산대첩? 직산전투!
1. 직산전투의 경과 : “하지만 명나라가 출동하면 어떨까?”
2. 직산전투의 영향 : “도성이 텅 비었다.”
3. 한편, 바다 : “조선수군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4. 일본군의 후퇴? : “왜놈들이 왜 후퇴하는 거야?”
5. 잔머리의 제왕 : “직산대첩 만세!”
결론 :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차회예고 : 직산전투 보다는 중요한, 하지만 별로 비중 없는 직산전투의 전략적 의의

by zert | 2009/10/29 09:11 | 임진왜란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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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조선수군 만세!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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