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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해 주신 분들...정말 감사드립니다(_ _)
정말 생각지도 않게 이오쟁패 이오공감까지 올라갔군요.
더 노력하고, 더 정진하여, 더 좋은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방문해 주시고 관심을 표현해 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_ _)

임덕 역덕들 역밸 유저들이 이글루를 장악-_- 이오공감하게 하는 그날까지-_-)!


PS : 직산전투 연재해야 되는데, 꼭 시험기간 되면 책을 많이 읽듯이-_- 딴 소재를 다루고 싶어지는 군요 OTL
by zert | 2009/11/04 22:53 | 잡담 | 트랙백 | 덧글(6)
우와 이글루 메인에 떴다 ㅎㄷㄷ


우와아아앙. 간혹 역밸 메인에 뜨는 경우는 있었는데 마이너 역덕밸리 출신 제 글이 메인에 떴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 입니다^^;;

역시 이러니저러니해도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기쁩니다^ㅅ^

....이제 다음은 최초로 이오쟁패 이오공감에 올라가 보는 것인가....후후후+_+)

by zert | 2009/11/02 21:19 | 잡담 | 트랙백 | 덧글(14)
[명량대첩] 명량대첩의 전개와 의의

본문 소개 : 충무공은 항상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나 님이 지휘하면 싸워 이길 수 있음. 깝ㄴㄴ"
본문 소개 : '사람 한 명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의 증명. 무기체계는 결국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1. 서  론


2. 본  론
1) 명량해전의 개요
2) 조선의 무기체계
3) 조선수군의 편제
4) 일본의 무기체계
5) 일본함대의 편제
6) 전  개   과  정
7) 일 본 의  피 해
8) 의           의


3. 결  론

 


1. 서  론
일반적으로 임진왜란에서 3대 대첩이라고 하면 ‘한산대첩’, ‘행주대첩’, '직산대첩', ‘노량대첩’ 등을 꼽는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그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로 이순신 장군은 한민족에게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아왔다. 그러한 존경과 추앙의 분위기가 그것이 현대까지 이어져 우리에게 임진왜란 이라는 전쟁이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실질적인 심도 깊은 연구와 본격적인 연구가 제대로 된 경우는 드물다. 충무공과 임진왜란을 '알고' 있는 것과 심도 깊게 아는 것은 별개라는 소리이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사료와 자료가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전산화되는 작업이 근래에 와서야 시작되고 정착되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문헌과 자료에 의지하던 종래의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비판 받거나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에 당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각종 전쟁사에서 역사학을 전공으로 하는 연구자가 실질적으로 전무하다시피하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는 지엽적이거나 피상적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한 이른바 ‘대첩’이라는 분류도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연히 일반화된 사실들을 통하여 추론 된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수정되고 변화가 되어야함은 물론이다.

여기에서, 명량해전에 대해 알아보고 그 과정과 의의에 대해 논하면서 명량해전에 대한 재조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2. 본   론

1) 명량해전의 개요
명량해전은 1597년, 선조 30년이자 정유년 9월 16일에 하루동안 발생한 전투이다. 9월 16일 오전에서부터 오후까지 한나절 가량 지속된 캐사기 전투로 이에 대한 의의에 대해서는 뒤에 논하겠다.

명량해전에 대해 논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보아야 할 것이 당시 사회의 분위기이다. 현대인들은 이순신 장군이 ‘당연히’ 이겼음을 알고 있고 명량해전이 막연하게 ‘10대 1’의 전력차를 극복한 전투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과연 조선 수군이 승리하리라 생각했으며 기대했을까?

당시의 시대 분위기는 실록과 각종 문헌집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실록에 보면 직산전투 이후 ‘도성이 텅 비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충청-경기 일대까지 접근한 일본군 때문에 혼란에 빠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애초에 수군에 대한 기대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8월 중에 수군을 해체하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하지 않았는가? <상식적>으로 보면 그것이 옳은 판단일 수도 있다.
어쨌든 칠천량에서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임금이 후궁과 왕자들을 피난시키려고 하자 그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논쟁이 이루어지고, ‘대소신료들의 가족은 피난했는데’ 어째서 왕실이 피난 가는 것을 반대하냐는 멋진 임금의 반박도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의 정치적, 외교적 회피술책으로 인하여 직산전투가 명량해전 이후에 어느덧 직산대첩으로 둔갑하는데, 우습게도 직산전투 이후에도 여전히 도성은 피난 분위기였다. 즉, 충무공과 조선수군이 진도에서 싸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승첩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에서도 ‘10여척의 이빨 빠진 조선수군’을 신속히 격파하고 서해에 진입하여 충청도에 대기 중이던 육군에 보급을 하려하고 있었다. 물론 명량해전 전까지 조선수군의 잔여 병력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아 일본군도 과감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지만 조선수군의 잔존 병력이 얼마 되지 않음을 짐작하고 있었고, 명량해전 즈음에는 조선수군의 전선 보유 척수까지 대강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 사실은 전투 이틀 전인 14일자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 역시 조선수군과 싸워 진다거나 혹은 고전할 것은 전혀 계산하지 않았고 충청, 경기에 전개 중인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에 보급을 하는 것에 신경쓰고 있었다. 사실 고작 13척의 배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조선 정부에서도 수전에서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아 수군을 전폐하고 육전으로 싸우라는 지시를 8월 중에 내리기도 한다. 옳은 판단이다. 아무리 막강한 판옥선이지만 고작 10여척의 배로 왜선 1000여척을 상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 남원성 전투 이전에 일본군이 전투에 투입한 전선 수는 오차가 있지만 일본군이 남원에 5만여명의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믿었듯이 당시 일반인들ㅡ어쩌면 충무공도ㅡ왜선 1000여척이 온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사실 아주 거짓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전투 경험이 많은 수군을 육군으로 전환해도 될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는.

그러나  충무공은 “지금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유명한 장계를 통하여 수전에서 싸울 수 있음을 주장하고 전투준비를 하기에 이른다. 애초에 상식적으로 행동 할 것이었으면 싸우러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다.

여기까지 알아보았을 때 당시에 조선수군의 승리는 고사하고 패배가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조선이라는 국가가 전쟁에 패배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은 당시 모친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는데, 당시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이는 간단하게 통제사 임명을 거절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만약에 그가 통제사 제수를 거부하였다하더라도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실제로 한산도가 무너진 (이른바 칠천량 패전)이후로 조정에서 장수들에게 싸울 것을 임명하지만 병이나 각종 이유를 핑계로 혹은 부임지에 가지 않거나 도망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참전을 거부한다.
반면에 이순신 장군은 거절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참전을 거부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질병이라는 궁색한 핑계가 아니라 <모친 상 中>법적, 도덕적인 완벽한 근거가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때 자신을 헌신짝처럼 내친 조정의 명을 받아 싸움길로 나선다.
싸우지 않아도 될 법적, 도덕적 근거가 완.벽.히. 있는데도

[이런 사람이 영웅이 아니고 성웅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영웅인가? 여기서 어떻게 "만들어진 영웅"을 감히 운운 할 수 있는가? 나중에 따로 포스팅을 할 예정이지만 임진왜란 이후, 특히 정유년 이후와 충무공 전사 이후 수백년간 공은 이미 한민족의 영웅이었다. 일부 정권이 충무공을 띄워준게 아니라 한민족 내부에 자리잡은 충무공의 명성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2) 조선의 무기체계
한민족은 반만년 역사 동안 항상 화포덕국 조선의 경우 장거리 투사 무기의 발달로 인하여 우수한 성능을 지닌 활과 총통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민족의 뛰어난 활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유명하고, 당시 명나라인들과 일본인들도 알고 있었다. 더욱이 포방부의 주도로 각종 논의 끝에 총통으로 대표되는 화포덕국 역시 발달해 있었으며, 이러한 무기체계가 판옥선이라는 전함과 결합되자 상상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① 판옥선

조선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은 아이러니하게도 선조 이전의 임금들이 왜구들에 시달리자 그에 따른 방책으로 나온 전투함이다. 일반적인 대맹선을 더욱 크게 만들고, 그 위에 판옥을 올려 노꾼들을 보호하였다.
일본의 주력 전선인 세키부네는 이 보다 홀수선이 낮아 판옥선에 접근하여 선상백병전을 수행하려면 사다리를 통해 올라가야 할 정도였다. 또한 각종 총통과 화살로 무장함으로써 백병전 이전에 적을 제압했다.

함포사격을 위주로 하는 근대해군과 선상백병전을 중심으로하는 중세해군의 싸움.
사실, 조선수군이 그동안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래서 <지휘관>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망각한 체 통제사가 바뀌었다. 그리고 나라 멸망 직전까지 간다.

② 장거리 투사무기
‘조선은 활의 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선에는 활을 중시하였다. 궁시는 무과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고 사대부들의 필수교양이었다. 실제로 선비 서너 명이 활을 통한 유격전으로 일본군 일개 중대를 저지하고 돈좌시킨 경우도 있으며 수전에서도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부(射夫)라는 직책이 있었다.
또한 화포덕국조선 초기부터 발달한 화포무기 역시 수전에서 쓰였는데, ‘천지현황’자 총통들이 있었으며 이것을 다루는 화포장, 방포장 등이 편제되어 있었다.


최근 밝혀진 실험과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수전에 있어서 롤링, 요잉을 고려하여 조선수군이 정확한 명중률을 보장하려면 그 유효사거리가 300미터 이내라는 결과가 밝혀졌다. 이는 문헌적 근거를 토대로 한 것으로, 물론 조선 수군이 함포전을 주력으로 하였지만 선상백병전을 수행할 능력 역시 구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절망적인-_- 조선군의 재장전 시간을 고려했을 때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함포전이 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수군은 꾸준히 적과 접현전을 벌였고, 최소한 조총으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물론, 조선수군 사망 원인 1위는 이순신이다.


3) 조선수군의 편제
난중일기와 실록의 기록, 장계와 각종 문헌에서 직접적으로 확정 할 수 있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총지휘관 :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중군장 : 미조항 첨사 김응함
거제 현령 안위
평산포 대장(代將) 정응두
영등포 만호 조계종
조방장 배흥립
전라우수사 이누야사 김억추


이상 13척
+ 피난선 다수(100여척 추정)

이들을 비롯한 총 13척의 전선이 동원되었으며 세간에서는 앞에서의 충무공의 장계에 따라 12척이 삼도수군의 전부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배를 끌고 온 시기를 보았을 때 13척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충무공을 따라 종사한 장수들의 가문 기록에 보면 피난선을 꾸며 의병(疑兵)의 역할을 했다고 하며, 또한 각종 기록에서도 피난선을 의병(疑兵)으로 활용했다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정작 난중일기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설사 실시했다고 해도 판옥선 보다 체급이 작은 피난선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 할 수 있었는지는 기대하기 힘들다. 일단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 중군장의 역할
: 중군장의 역할은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휘하 장수들에게 전파하고 지휘,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항상 좌선(坐船) 근처에서 지휘관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 중군장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시라!]


4) 일본의 무기체계
① 철포(조총)

조총이 일본의 전국시대부터 도입되었지만 그것이 가공할만한 힘을 지닌 공전절후의 무기는 아니었으며, 조선에 전혀 생소한 공전절후의 비밀무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조선의 남해안 지방은 조총을 활용하는 왜구들과 교전한 경험이 있었고, 북방에서 야인들이 조총을 활용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차원에서도 조총의 존재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다만 조선이 조총의 존재를 등한시한 것은 이미 조선군 자체에 총통이라는 편제화기, 개인화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며 조총보다 사거리와 살상력이 뛰어난 활이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결국 보편화, 양산이 쉬운 조총에 활은 그 자리를 천천히 내주게 된다.)

그러나 판옥선이 조선의 비밀무기가 아니었듯이 단순히 상대방의 무기체계를 알기만한다고해서 그것에 대한 방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양 국가는 서로의 무기체계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② 장창
일본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세계 보병들의 주력 무기는 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로마군단도 글라디우스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창이 주력 무기였으며 글라디우스가 보급되어도 창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또한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일본에서 철포병(조총병)의 비율은 비용측면 때문에 10~30퍼센트 사이에 있었고 장창병들의 비율은 30퍼센트 이상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장창의 경우 유달리 긴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창의 길이가 4미터인 경우에 반해 일본의 장창은 평균 5~6미터의 길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창으로 찌르는 것 뿐만 아니라 내려치는 전술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구와 일본도의 이미지와 인식 때문에 당시 기록에서도 일본의 장창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③ 세키부네
일본이 통일이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의 일로 중앙집권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1세기가 흐른 상태였다. 따라서 중세 지방영주들로 볼 수 있는 다이묘들에 의한 영주국가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집권화 된 관료 국가 조선에 비해서 군사제도와 무기체계 면에서 통일되지 않고 지방적인 특색을 보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마찬가지로 세키부네의 경우에도 그 규격이 통일되지 않아서 조선 측 기록에서 안택선으로 혼동할 만한 세키부네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수군의 전술은 어디까지나 선상백병전이었고 세키부네 역시 그러한 것을 고려하여 제작된 전선이다. 실제로 판옥선에 대한 대비책으로 판옥선급 세키부네가 후기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조선수군의 교리와 전술까지는 따라하기 힘들었다.


안택선이 일본수군의 주력전선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기록들을 살펴보면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안택선은 일본수군의 주력전함인가? 참고)


5) 일본함대의 편제
실질적으로 현대인의 오해와 달리 일본함대는 단순히 일본 수군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근대 해군이 성립되기 이전에 보편적인 현상으로 단순히 일본에만 국한된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에 의해 규격화된 전선과 무기체계, 장교,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는 조선이 당시대에 걸맞지 않은 근대 해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기간 동안 벌어진 해전에서 피해를 입은 것은 일본 수군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해적, 육군 수송함대, 수송선 등이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가토 기요마사나 고니시 유키나가 소속의 배가 해전에 참가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는 사료도 있다(이하 일본함대라 칭함)

그렇기 때문에 명량해전에서 동원된 일본함대는 내도수, 마다시로 알려진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부대 뿐만 아니라 간양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배로 무안으로 간 자’와 혹은 기타 기록에서 명량해전에 참전했을 것으로 보이는 무장들을 포함했을 때 도도 다카도라를 비롯한 남원 전투에 동원된 수군 소속 무장과 육군 소속 무장 등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으며 기타 순수 수송선 200여척이 참여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명량해전이 그 전개 과정과 결과에 비해 연구된 바가 적고 임진왜란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록 대다수가 한국에 있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명량해전에 어떤 영주들이 출전했는지 정확하게 규정을 지을 수 없다.

또한, 일본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도 논란의 요지가 존재한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토대로한 기존의 정설은 ‘133척’이 적선의 규모이다. 그러나 명량대첩비의 300여척과 1000여척의 적이 몰려오고 있다는 과장된 소문까지 미루어 보았을 때, 또한 정유년 당시 상기에 명시한 영주들이 동원한 병력과 동원 가능한 척수를 고려해 보면 300여척(순수 수송선 200척 제외)의 적선이 명량해협으로 오지 않았다고 단언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충무공전서에도 나오는 400~500여척의 숫자는 비록 피난민들의 증언이긴 하지만 단순히 과장된 숫자라고만 판단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300여척 모두 수전으로 동원된 배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판옥선에 '올라가서' 싸워야하거나 조총이나 활을 쏴야하는 것은 일본수군이나 일본육군수송함대나 똑같다.


6) 전개과정
한산도에서 조선수군이 무너진 소식이 도달한 이후 이미 권율은 이순신에게 비공식적으로 수습을 부탁하였고, 조정에서는 7월 23일 삼도통제사에 재임명하는 교서를 작성하였다. 이 교서를 8월 3일 이순신이 받아 보았고 그 직후부터 공식적으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게 된다.

이후 이순신은 8월 말까지 전라도를 순찰하며 병사들을 수습하고 화약과 각종 군기를 모은다. 그리고 9월 초부터 14일까지는 벽파에 진을 치면서 일본군과 신경전을 벌이며 소규모의 자잘한 전투를 치룬다.

이후 15일에 전라우수영으로 진을 옮기고, 그 이튿날인 16일에 명량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따라서 철쇄아 철쇠사슬을 설치할 시간적, 인적 여유도 없고 무엇보다 쇳덩이도 없다-_- 철쇠사슬에 관한 떡밥은 워낙 많은 곳에서 논파 되었으니 생략하겠다]

먼저 명량해전에 대한 가장 신뢰성이 높고 정확한 기록인 난중일기를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보도록 하겠다.

'진도대교'는 현재 진도와 화원반도를 잇고 있다. 진도대교에서부터 진도의 벽파 사이의 울돌목에서 명량해전은 일어났을 것이다.



- 130여척의 배가 에워쌌다
→ 이 부분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은 진도 앞의 울돌목이 아닌 전라우수영 앞이나 혹은 양도와 진도 사이의 바다에서 전투가 치러졌을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울돌목의 물살은 때에 따라서는 11노트에 다다르며, 정확한 연구와 실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단순 추정에 불과하지만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속도가 4노트임으로 울돌목에서는 싸울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해류의 속도와 전선의 속도에 무조건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징비록이나 다른 기록들에 의하면 ‘조류를 이용했다’는 식의 기록이 있다.
결정적으로 당시의 기록은 울돌목이 아닌 오히려 그 앞 바다라고 할 수 있는 벽파정, 진도 앞바다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후에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1마장 뒤에 물러선 삼도수군, 그리고 2마장은 더 뒤에 있는 우수사 김억추의 전선이라는 표현이 난중일기에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우수영 앞바다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양도와 진도 사이의 넓은 면적을 상선 혼자 감당하기에는 다소 벅차다.


-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 보고는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 흔히 명량해전은 일자, 혹은 학익진으로 늘어선 삼도수군 13척이 해협 돌파를 시도하는 왜선 2~3척을 각개격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인의 오해와 상상과 달리 당시의 참전자인 이순신은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 해전사를 통틀어 명량대첩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어쨌든, 적들이 몰려 오는 것을 본 장수들이 오히려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 밖에 나가 있었다.
→ ‘명량해전은 철쇠사슬로 이겼다.’라는 문헌적 근거는 20세기에 지어진 이른바 김억추 행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나마도 ‘공이 칼을 휘두르자 왜선 수백척이 깨졌다.’라는 식의 사료적 근거와 신뢰성이 대단히 떨어지는 기록이다. 당대의 그 어떠한 문헌에도 철쇠사슬을 사용했다는 근거는 없다.


-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 부하들이 뒤로 물러서자 대장선인 상선(上船)이 앞으로 나아가며 해협을 가로 막게 되는 것이다. 

..........
그저 존경할 뿐. 뭐라 표현하는 것 자체가 공에 대한 모독이다.



- 탄환이 폭풍우 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 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 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 이때 구루지마 함대가 돌파를 시도한다.


 - 그러나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아무리 충무공이 지휘하는 강력한 판옥선이더라도 적선에 둘러쌓여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 하였다.
→ 자칫 전장공포로 인하여 부하들의 전투의지가 붕괴될 시점에서 충무공이 독려를 하는 시점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지휘관의 역할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부하들의 전투의지를 어떻게 고양하고 유지한다는 역할은 변함이 없다.


-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 하였다.
→ 이것이 드라마나 세간에서의 인식과 전혀 다른 기록에서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충무공의 성품은 공명정대하여 임진년 때부터 공을 세운자는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분명하게 기록하여 알렸다. 그런데 상선 혼자 싸우는 현 시점까지 부하장수들이 도왔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1마장(1킬로미터 남짓한 거리) 밖에 물러서 있었고 그나마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보이지도 않았다.


-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 또한, 다름 아닌 ‘중군장’이 통제사 곁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부하장수들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조선시대에서 중군장의 역할은 총지휘관을 보좌하고 명령을 통하여 직접적인 전투를 지휘한다. 뿐만 아니라 총지휘관 곁에서 총지휘관의 안전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중군장이 상선 곁을 떠나있었다는 것이야 말로 수군이 명령 없이 뒤로 물러선 것을 뜻한다.


-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 ‘초요기’란 휘하 장수들을 부르는 깃발이다. 이에 머뭇거리던 부하들 중에서 거제 현령 안위가 가장 먼저 왔고, 중군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낀 김응함이 왔을 것이다.


-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였다.
→ 어떤 소설에서는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여 안위를 겁 많고 비루한 인물로 만들었지만, 12척의 전선 중에서 가장 먼저 싸움에 복귀한 것은 거제 현령 안위이다.


-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하였다.
어느 부분에서도 12척의 배가 작전상 후퇴했거나 솔선수범하여 부하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앞장섰다는 식의 맥락을 찾을 수 없다. 중군장으로서 물러난 것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을 묻고 있으며, 상선이 불가피하게 해협을 틀어막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추측과 짐작-_->대로 충무공이 사기를 고양하기 위해, 혹은 작전상 선두에 섰는데 나중에 안위에게 군법에 죽고 싶냐느니, 중군장에게 목을 벤다더니 한다면....충무공은 그야말로 정신병자이다ㅡ.ㅡ 선조 임금이냐? 가토 기요마사 잡으러 안갔다고 말도 안되는 생트집을 잡은 것처럼? 이렇게 사료를 보면 추측과 짐작이 무너진다.]

-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시하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붙듯 하여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였다. 안위의 격군 일고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멩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 거제선이 위험에 쳐했지만 이순신이 탄 단 한 척의 판옥선도 쓰러뜨리지 못한 일본함대로서는 본격적인 패배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운이 빠지게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 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다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代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적은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왜인 준사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미치후사)입니다."하고 말했다.
선두무상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펄쩍 뛰면서 "정말 마다시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드라마에서와 달리 전국시대 일본의 직급이 높은 영주는 결코 전선 앞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상황이 유리하거나 반대로 부하들을 독전할 필요가 있을 때 직접 나가는 경우는 존재했다. (이건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일이다. 지휘관이 가장 앞에서 싸우다가 죽으면 누가 부하들을 수습할 것인가? -_- 영주가 죽으면 실업자가 될 수도 있는데?)
즉, 가장 안전하고 후미에 있어야 하는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죽었다는 것은 휘하 병력의 궤멸을 뜻한다. 바꿔 말하면 일본 함대 전체에서 선봉이 궤멸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올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 다시 말하지만 명량해전이 수전(守戰)이라는 오해와 달리 초기의 상선 혼자 해협을 지킬 때를 제외하고는 조선수군이 공세적으로 적들을 공격하였다. 당대의 자료들을 찾아보았을 때 ‘주사(舟師)가 뛰쳐나가 적들을 분멸하였다.’라는 식의 기록이 보인다.
이제까지 겁을 먹었던 아군들이 드디어 용기를 얻고 휘하의 전선들이 해협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 지자, 현자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 조선수군이 완전히 공세적으로 돌아섰음을 의미한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했다.
→ 실록에서는 20여척, 난중일기에는 31척으로 되어 있으나 앞에서 추론한 적선의 동원 규모는 300여척이 넘고 난중잡록에서 ‘살아 돌아간 배는 10여척’을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았을 때, 순수하게 완전히 깨트린 전선이 30여척이라면 납득이 가능한 숫자이다. 또, 난중잡록에서의 기록도 순수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배만 10여척이라고 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근거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하겠다.


- 싸움하던 바다에 그대로 정박할까 싶었다. 그러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서 우리 편의 형세가 외롭고도 위태로운 듯하여 당사도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도우셨다.
→ 마침내 명량해전이 종료되었다. 명량대첩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7) 일본의 피해
앞에서도 논했지만 순수하게 침몰시킨 배만 31여척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선 조선수군이 수세 중에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함대가 전멸하였고, 안위를 비롯한 아군 장수들이 뛰쳐나가면서 일본 함대 전체에 큰 피해를 준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명량해전 당시 일본 수군의 총대장이었던 도도 다카도라가 부상을 입었으며 군감이 물에 빠져 구조될 지경이었다.
위에서도 제시했지만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야하는 총대장과 군감이 부상을 입었고 구조 되었다는 소리는, 본진이 조선수군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왜 수군이 궤멸당했다는 것을 뜻한다.


8) 의의
혹자는 ‘직산대첩’을 근거로 명량해전과는 별개로 이미 일본군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한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직산대첩’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으며 도성 방어에 대한 논의를 해야 했다. 더욱이 왜군이 직산에서 ‘패배’하였지만 오히려 후퇴를 가장한 기만책을 하고 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실질적으로 직산 인근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전개되고 있었고 명나라 군대를 더욱 끌어들이면 포위 섬멸이 가능한 위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정부가 의심을 한 것은 타당하다. 실제로 명량해전 즈음까지 일본군은 경기도 인근과 충청도에 여전히 전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명량에서 승리가 보고 된 이후에 선조의 행동을 보면 참으로 역설적으로 명량해전의 의의를 알 수 있다. 명량해전 이후에 선조는 갑작스럽게 ‘직산대첩’에 참가한 명나라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감사인사 순례를 다닌다. 조선수군의 승리를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정치적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한심한 행태라고 볼 수 있다.(관련 포스팅은 추후 연재하겠습니다^^;;)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부터 남쪽의 수로(水路)에 적선이 종횡하여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현재 소방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봉(賊鋒)이 <<<조금 좌절>>>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년 11월달에 명나라 군대에 선조가 보낸 글에서도 ‘작은 승리로 적봉을 조금 좌절’이라고 평가 절하하면서 바로 뒤에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명량대첩의 결과로 충청도 인근에 전개된 일본 육군으로 해로수송이 좌절 되었으며 이로 인한 한성 공략 역시 좌절되었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9월 16일 이후에 일본군은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모습을 보인다[전략적 기동으로 보이는 퇴각하는 모습은 16일 이전에도 분명 있었다]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에 버로우주둔하게 된다.

명량해전 이후로도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입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일본군의 서해 진입은 그 역할을 잃었으며 고금도와 보화도에서 재건한 조선수군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무술년에는 조선수군의 힘만으로 전라도 대부분의 지방을 탈환하게 된다.

더욱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패전, 패망, 패국으로 가던 분위기를 일거에 쇄신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병을 핑계로 혹은 임지에 가지 않아서 싸우는 것을 꺼리는 무관들을 다시 싸움터로 보내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가장 큰 의의는 비로소 싸워야만 1퍼센트의 승산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아무리 미사일 몇 발로 지구가 멸망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결국 지휘관의 전투의지만큼은 어느 시대나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3. 결   론
지금까지 살펴본 봐와 같이 명량해전은 그 중요성과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전투이다. 오히려 막연한 인식이나 오해를 통해 잘못 알려진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명량해전을 통하여 우리는 단 1명의 용기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단순히 뛰어난 무기체계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화포가 발달하고 전함이 일본보다 우세한 조선수군이 해전에서 일본을 일방적으로 이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다. 어쨌든 양이 이끄는 사자떼는 사자가 이끄는 양떼를 이길 수 없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명량대첩은 한산대첩 이상의 성격을 지닌다. 한산대첩이 본격적인 일본 함대의 투입을 좌절시키고 일본의 해전 포기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면, 명량대첩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모두가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싸움에 임하여서 국가와 민족을 구했다는 것에 그 의의를 갖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일본함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해로 진입하였다면 증강된 병력과 보급을 받은 일본 육군이 이후에 어떻게 진격했을지는 상상이 가능하다.

명량해전, 명량대첩은 ‘철쇠사슬’이나 ‘강강수월래’ 같은 전설이나 민담에 기대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신뢰성 있는 기록과 자료를 통하여 그 진실에 접근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은 문치국가인 조선을 중심으로 전개된 전쟁이고, 조선의 다양한 식자층과 백성들은 다양한 기록들을 남겼다. 비단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당시의 관료였던 이들이 남긴 신뢰성 높은 기록과 문집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충분한 교차 검증이 가능하다.

이러한 연구는 임진왜란에 잘 알려진 전투들뿐만 아니라 다른 전투를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과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문 요약 : 명량대첩은 일본군의 퇴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다.


PS
0. 전사자 적기로 악명 높은(?) 조선수군-_-
한나절 가량 해협을 틀어막은 상선에서 사상자 2명 발생-_- 정말 더럽게 안죽는 부대입니다-_-

1.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연구된 논문이나 서적에서도, 충무공 이순신이 홀로 해협을 틀어막았다는 것을 인정-_-하는 것을 찾기 힘듭니다. 그렇게 주장하면 "또 이순신 띄워주기 ㅉㅉㅉ", "객관적-_-으로 역사를 보자"라는 분위기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충무공의 역할을 쉽게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인지...

2. 어쨌든 명량대첩은 충무공이 지휘한 대부분의 전투와 마찬가지로 결국 공세전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통제사께서 '요란 법석을 떨었다'고 적었으니 그야말로 일본함대는 불벼락, 화살벼락을 맞았을 겁니다.

3. 사실 조선 정부도 명나라도, 일본도 조선수군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외국인 신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강했는지에 대해서 한참 잘못 짚고 있었죠.
판옥선이 크고 견고하고 단단해서. 왜선이 허접해서. 총통과 활이 강하니까...원균이 용감해서 등등
이래봤자 무능한 지휘관이 지휘하는 현대의 군대라도 유능한 지휘관이 지휘하는 어린이들과 싸워도 질 수 있는 겁니다. 무수히 많은 역사에서 너무나 많이 확인한 진리입니다.

"이순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조선 수군을 지휘했다면 그 정도는 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 사람 군대에 안가봤거나-_- 역사 공부 제대로 안한 사람입니다.

4. 하고 싶었던 명량대첩에 대한 글도 올렸으니, 이제 마음 편하게 직산전투에 대해 써야겠군요~_~

by zert | 2009/11/02 18:54 | 무적조선수군 | 트랙백(4) | 핑백(1) | 덧글(176)
역사 공부하다가 부딪히는 장벽
오늘도 죽지 않고 돌아온 임덕후 zert입니다.
직산전투에 대한 연재가 되어야하나...얼마나 연재를 했다고 중간에 잠깐 쉴겸 잡담하나 올려봅니다^^


솔직히 다른 영역에 계신 분들이 자신과 관련이 있는 역사 공부를 할 때 어떻게 하시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역사 공부는 책, 논문들과 싸워야하고 더 나아가서 현지 답사까지 병행되죠.

따라서 제가 덕후질 하는 임진왜란의 경우 1차적으로는 1차 사료들과 싸웁니다.
다행히 신뢰성이 높은 인물들...그러니까 류성룡, 이항복, 조경남 등등 같은 분들이 쓴 기록은 대부분 번역이 되어 있고 찾기도 쉬워서 공부하기 편합니다.
그외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민간인이거나 중인 신분의 오희문, 이탁영 등등의 책들도 번역이 된 상태죠. 그 외에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번역이 되어있다, 알려져 있다는 것은 희소성-_-이 떨어져 떡밥 연구거리가 적다는 거죠.

그래서 때로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원서를 읽어야 할 필요가 있죠. 그렇게 함으로써 신빙성은 차지하고서라도 의외의 기록이나 인식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관심이 많거나 상대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기록들이 집중적으로 연구가 되니까요.

문제는 이런 기록들이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다는 거죠-_-
저 같은 경우 한자검정 3급? 수준이고 음독도 간신히 때려맞추면서 합니다.
해석은 전공관련으로 한문강독 한 학기 배운 실력이라 애로사항이 꽃 핍니다.

더욱이 바다 건너 일본의 기록까지 봐야 할 경우에는 환장(......)
안 그래도 왜곡이 심해서 해석의 해석을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 한문도 해석하기 힘든데 중세 일본어 or 중세 일본식 한문이라...-_-
그나마 현대 일본인 학자들이 자기들 논문에 번역이라도 해놨으면 다행이죠-ㅅ-



아무튼 제 경우에 역사 공부와 싸우다보면 "내가 답답하다보니" 한문공부, 일본어 공부를 하고 싶게 만들어 주더군요 -ㅅ-
역덕질하면 역사 공부하면 그런 자발적인 학습 의욕이 고취된다는 점에서 좋은 것 같습니다.


PS : 그나마 임진왜란은 영미권에서는 연구가 전무해서 다행입니다 =ㅅ=;
아니, 뭐 그나마 영어라면 어떻게든 해석이 가능하니 차라리 그게 나을려나(......)

PS 1 : 다른 분들께서는 역사 공부하시다보면 어떤 장벽에 부딪히시나요?^^
by zert | 2009/10/31 21:08 | 역사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7)
제승방략...연구할 꺼리가 많은 전략

[조선] 유성룡이 생각한 '제승방략'에 대한 잡설

근위연대님의 글에서 트랙백 했습니다.


뭐...제승방략이라고 하면 무조건 경장京將을 해바라기처럼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질적으로 제승방략에서 어떻게 경장과 현지 지휘관들에게 지휘권이 나뉘어져 있는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서애 선생의 지적대로 군사들이 지휘관을 기다리다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병력이 분산되는 진관체제 보다는 거점 방어를 하는 기동방어 형식의 제승방략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승방략이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전국시대 사고방식으로 점령지 작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찍고 올라온 일본군의 진격속도의 영향도 크다고 봅니다. 그래서 경장을 기다리다가 일본군이 접근하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한 경우도 제법 많았죠. 물론 제대로 지휘를 하지 못한 수준 이하의 장수들이 많았던 것도 분명히 사실입니다.

어쨌든 류성룡 선생께서 진관체제가 지휘관과 군졸들이 호흡을 맞추기 쉬운 체제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지휘관(문무관)들은 공무원, 직업 군인들이지 봉건 영주가 아니죠-_- <간양록>에서 보면 거의 봉건주의를 부활시키자는 식의 주장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남의 떡이 더 커보이고 맛있어 보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죠 뭐-_-

각설하고, 조선시대 문,무관은 당연히 순환식 보직입니다. <경국대전>에도 명시되어 있죠. 따라서 정해진 시기가 되거나, 갑작스레 진급을 하거나 혹은 파직을 당하면 지휘관도 바뀌게 되는 거죠(.....)

<간양록>에서의 봉건제-_-나 진관체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물론 같이 호흡을 맞춘 지휘관이 있을 때 다행히(?) 전쟁이 일어나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보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순환식 보직이 더 장점이 많습니다.

더욱이 진관체제는 병력이 나뉘어 각개격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좋든 나쁘든 병력은 뭉쳐있는게 흩어져 있을 때보다 더 이익입니다. 란체스터 몇 법칙, 축차투입은 축차소모를 불러오고, 화력이라던가 부담이 덜어진다던가 이유는 많죠. 물론 대규모 도주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만-_-;;;;


어쨌든 제승뱡락이 비판 받을 만한 요지도 분명하지만 무작정 비난 받을만한 전략도 아닙니다. 뭐, 결국 속오군 체제로 바뀌긴하지만 말이에요.



PS : 제승방략과 조선의 방어대책에 대한 글은 번동아제님의 "임진왜란 초기 육상 전투와 조선군의 방어체제에 대한 몇가지 검토"를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읽다보면 조선 정부가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을 방어하기 위한 경장을 파견할 계획을 세운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래도 조선이 전쟁 준비를 안했다고?-_- 애초에 정발, 이순신 등의 지휘관이 대거 파견된 것도 전쟁계획의 일부다-_-)

by zert | 2009/10/29 22:48 | 임진왜란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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