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두기
사적이나 기타 유물, 유적 지정은 제외했습니다.
충무공 사후부터 시작된 증직, 추증, 사당, 동상, 비 등에 대해 주로 적었습니다.
비어 있는 공란은 제 능력이 모자라서 미처 채우지 못한 부분이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서기와 왕들의 연도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목 :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1/3)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모 열풍(1/3)
1회차 : 조선시대~1900년
1. 이글루스의 음모 때문에 본의 아니게 본문이 나뉘어지게 되서 쓰게 된 서론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영웅화와 성웅화, 성역화는 흔히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모 대통령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과연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그 사실을 <입증>할 필요성을 느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에 대해 접근하려면 사료적인 접근이 필요하겠죠.
조선시대~1900년
일시 | 행한 일 | 주관 | 비고 |
조선시대 |
1598. 11 (선조31) | 이순신 등 공을 세운 장수에게 증직지시 | 선조 | 장례 지시, 이순신 아들에게 관직제수 |
1598. 12 (선조31) |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요청 | 비변사 | 장례 완료/관직제수 완료 |
1599. (선조32) | 의정부 우의정 추증 | | |
1601. (선조34) | 여수 충민사 | 통제사 이시언 | 왕명, 이항복 현지시찰 충무공 관련 사액 사당 1호 |
??? | 석천사(石泉寺) 건립 | 승려 옥동 | 여수 충민사 수호 사찰 |
1603 (선조36) | 타루비 건립 | 수졸 | 수졸들의 자발적 건립 |
1604 (선조37) | 선무공신 1등, 덕풍부원군 추봉, 좌의정 추증 | | |
1606 (선조39) | 통영 충렬사 건립 | 통제사 이운룡 | 왕명 |
1615 (광해군7) | 여수 전라좌수영 대첩비 세움 | | |
1632 (인조9) | 초사(草舍)를 세움 | 남해인 김여빈, 고승후 등 | |
1643. 3 (인조21) | 시호(諡號) 충무(忠武) | | 이식이 서장을 씀 임금이 시호를 내림 |
1658 (효종9) | 남해 노량에 충렬사 세움 | 통제사 정익 | |
1659 (현종0) | 초사 철거, 대사당 세움. 이충민비로 고쳐 세움 | 어사 민승중 | 통제사 정익에게 지시 |
1661 (현종2) | 남해 노량에 묘비를 세움 | 우암 송시열 | |
1663 (현종4) | 노량, 통영 충렬사 사액(賜額) | 현종 | 현판을 내림 |
1688 (숙종14) | 해남-명량대첩 비 건립 | 전액 : 사포 김만중 씀 문장 : 이민서 글씨 : 이정명(해서체) | 근정전에 있었으나 광복후 지방 유지들이 되찾아 세움 |
1688 (숙종14) | 해남-충무사 건립 | | |
1689 (숙종15) | 정읍-충렬사 현판을 내림 | 숙종 | |
1704 (숙종30) | 아산 지방 유생들이 사당건립을 상소 | 아산 지방 유생 | 사당건립 상소 |
1706 (숙종32) | 아산 현충사 건립 | | |
1712 (숙종37) | 오충사 건립 | | 해남 용정리 |
1722 (경종2) | 유허비, 모충각 세움 | | 목포 고하도 |
1731 (영조7) | 월산사 세움 | | 전남 함평 |
1739 (영조15) | 제승당 유허비 세움 | | 한산도 |
1742 (영조18) | 이충민공비를 이충무공비로 고쳐 세움 | 5대손 호남절도사 이명상 | |
1777 (정조1) | 녹둔도 전승대비 세움 | | 함경도 녹둔도 |
1781 (정조5) | 전남 강진 금강사를 세움 | | 현무공 김억추 배향-_- |
1792 (정조16) | <<이충무공전서>> 편찬 지시 | 정조 | |
1793 (정조17) | 영의정 추증 | 정조 | |
1794 (정조18) | 어제신도비(御製神道碑) 세움 | 정조 | 10월 |
1795 (정조19) | <<이충무공전서>> 발간 | 정조 | 9월 |
1832 (순조32) | 이충무공 전몰 유허비 | | 남해 관음포 |
1847 (헌종13) | 오충사 건립 | 정철(丁哲)의 후손 정재선 | 충무공을 주향으로 오충신을 모신 사당 |
1877 (고종14) | 착량묘 | 10세손 통제사 이규석(李奎奭) | 임진왜란 후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낸 것이 사당의 시초(1877년 이전) |
1899 (고종26) | 남해 충렬사에 청해루 중수 | 11대손 이민승 | |
이상합니다....제 눈이 잘못 된 것 같군요.
원균 옹호론자들이나 충무공을 객관적으로 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이 성웅이 된 것은 박정희 시대의 일인데 아무래도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사실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실록의 다른 기록도 찾아봤습니다.
일개 무장인 이순신에 대해 "이순신", "충무공"으로 검색하니 놀라울 정도로 많이 나왔습니다!
선조 106권,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에 관한 치계를 올리다
사관의 평 :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중략)....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4168) 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
선조 107권, 31년( 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7일 무오 5번째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다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장계에,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중략)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영조 59권, 20년( 1744 갑자 / 청 건륭(乾隆) 9년) 2월 27일 을해 2번째기사
황해 수사 박문수는 황당선의 어로와 밀무역을 근절시키기 위한 계책 등을 아뢰다
황해 수사(黃海水使)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般)을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
영조 71권, 26년( 1750 경오 / 청 건륭(乾隆) 15년) 7월 3일 계묘 3번째기사
호조 판서 박문수가 상서하여, 용관을 줄이고 주현을 합치는 등의 변통론을 아뢰다
(중략)
"...또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고 못 얻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후략)"
--------------------------------------------------------------------------------
효종 6권, 2년( 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6월 6일 신해 3번째기사
부사과 민정중이 왕도·외직 임용·언로의 확대·기강 확립에 대해 아뢰다
(생략)...이순신(李舜臣)의 경우는 본디 미관 말직이었고 권율(權慄)은 명망이 없었으니, 혹시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하급 관직에서 늙어 죽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들이 뛰어난 재주를 지닌 줄을 몰라 오늘날 그 이름이 소멸된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 권율과 이순신 같은 인재가 늙어 죽어가고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후략)
-------------------------------------------------------------------------------
효종 21권, 10년( 1659 기해 / 청 순치(順治) 16년) 윤3월 30일 경인 1번째기사
첨지중추 심광수가 근래의 재이에 대해 아뢰다
(전략) 상이 승지 이경억(李慶億)에게 이르기를,
“아침에 이순신(李舜臣)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殉節)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 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
순조 11권, 8년( 1808 무진 / 청 가경(嘉慶) 13년) 1월 10일 정미 2번째기사
전 통제사 이당을 소견하고 통영의 폐단에 대해 순문하다
(전략) 임금이 말하기를,
“이순신의 사적(事蹟)이 무슨 책에 있는가?”
하니, 승지 박종훈(朴宗薰)이 말하기를,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손으로 조정에 있는 자가 누구인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이인수(李仁秀)·이승권(李升權)이 모두 그 자손입니다.”
하였다.
-------------------------------------------------------------------------------
정조 38권, 17년( 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7월 21일 임자 1번째기사
충무공 이순신을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한다고 전교하다
(전략)...또 생각해보면 충무공의 그 충성과 위무(威武)로서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을 가증(加贈)하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유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 공신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의정부 좌의정 덕풍 부원군 행 정헌 대부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 겸 삼도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에게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하라.(후략)
-------------------------------------------------------------------------------
숙종 49권, 36년( 1710 경인 / 청 강희(康熙) 49년) 12월 17일 정축 2번째기사
전라도 고금도의 관왕묘에 진인과 이순신을 향사하는 일을 논의하다
(전략)...조정에서 또한 오히려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데, 이순신의 공로(功勞)는 국조(國朝) 이래로 없던 것이었으니, 비록 사묘(祠廟)에서 거행하는 향사(享祀)라 하더라도,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는 것이 숭배하여 보은(報恩)하는 도리에 지나치지는 않을 것입니다.”(후략)
"(중국의) 옛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충무공 이순신은 어려운 가운데에세도 배를 만들고 적을 쳐부쉈는데..."
"이순신의 공로는 국조 이래로 없던 것"
"적을 막는 것은 사람을 얻고 못 얻고에 달린 것 입니다....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1회차 본문 요약 : 조선왕조실록이 잘못 되었겠죠.
다음화 예고 :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앞장 선 충무공 이순신 ㅡ.ㅡ
PS : 직산대첩 본문 1을 올리기 위한 웜업^^
● 여수 충민사(1601년 선조34 건립)
1993년 6월 1일 사적 제381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9만 556㎡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3년 뒤인
1601년(선조 34) 왕명으로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이 현지시찰을 하고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의 주관 아래 건립, 사액(賜額)된 충무공 관련 사액사당 제1호다.
원래는 충무공 주향(主享)에 전라좌수사 의민공(毅愍公) 이억기(李億祺)가 배향되었는데, 1677년(숙종 3)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870년(고종 7)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1873년 증수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다시 철폐되었다가, 1947년 지방유림이 원위치에 재건하였다.
경역은 1975~1984년 크게 증수 정화되어 사당(목조 와즙 13.23평)과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 외삼문인 숭모문(崇慕門), 충민사유허비(忠愍祠遺墟碑) 등이 있고 경역 밖에는 하마비(下馬碑)·홍살문·관리사무소 등이 있다.
또한 충민사 바로 곁에는 충민사의 수호사찰인 석천사(石泉寺)가 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을 선상(船上)에까지 따라다니며 모신 승려 옥동(玉洞)이 충민사가 세워지자 이를 수호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큰 암석 밑에서 솟아나는 샘물에서 절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 통영 충렬사(1606년 선조39 건립)
사적 제236호. 1973년 지정. 면적은 9,049m2이다. 이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다. 1606년(선조 39) 제7대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왕명으로 세웠으며, 1663년(현종 4) 사액(賜額)되었다. 그 후에는 역대의 수군 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충렬사는 본전(本殿)과 정문(正門) ·중문(中門) ·외삼문·동서재·경충재·숭무당·강한루·유물전시관 등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경내에는 많은 비석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81년(숙종 7)에 제60대 민섬 통제사가 세운 통제사충무이공충렬묘비이며 충무공 후손통제사 비각 2동에 6기가 있고, 이운용 통제사 비각, 김중기 통제사 비각, 유형 통제사 비각이 있다(=후임 통제사들이 너도나도 비각을 세웠다라는 의미-_-)
유물전시관에는 명나라 만력제가 내린 8가지의 선물인 명조팔사품(보물 440호)과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고 1질을 통영 충렬사에 내리면서 직접 지어 내린 제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순신 빠돌이-_- 정조가 직접 지어내린 제문이 있음)
● 현충사(1706년 숙종 32 건립)
충청 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있는 사당 이름. 아산 지방 유생들의 상소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장군 이순신(李舜臣)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건립하고, 그 이듬해 ‘현충’이라 사액(賜額)함.
조선왕조실록,
실록,
이순신,
충무공,
임진왜란,
박정희,
영웅,
성웅,
영웅화,
만들어진영웅,
무적조선수군,
조선,
조선수군,
조선군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